1. 문제의식: 초인과 금욕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니체의 ‘초인’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된 건, 선악에 대해 알아보던 중이었다.
초인이란 금욕주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고통을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 자기만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했다.
뭐… 아무튼 그런 거라고, 막연히 이해했다.
반면 금욕주의는 상대적으로 이해가 쉬웠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성인들처럼,
고통을 감내하며(참으며) 수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충 구분하며 넘어가려는 순간,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초인도 고통을 감내하고, 성인도 고통을 감내하는데… 똑같은 거 아니야?”
누가 보면 엉뚱하고 유치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이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니체가 말한 초인과,
그가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했던 금욕주의에 대해 더 깊이 파보기로 했다.
2. 니체가 말한 금욕주의란?
“고통은 살아 있음의 증거가 아니라, 죄의 결과라고 믿는 사람들. 그들이 금욕주의자다.”
— 『도덕의 계보』
니체가 말한 금욕주의는 고통을 감내하는 자세에 대한 비판이다.
인간은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고통을 견디며 나아가는 과정을 인생이라고 생각한 니체는 고통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시작했다.
고통에 대해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니체의 시대 이전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답은 금욕주의였다.
고통을 감내하며 이겨내는 것을 통해, 스스로가 신에게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도덕적 우월성을 표현하는 것이 금욕주의이다.
니체는 실제로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병들어가는 인간의 의지를 붙잡는다.
고통을 해석해주는 사람, 바로 사제다.”
— 『도덕의 계보』 제3논문
니체는 고통을 그저 ‘신의 형벌’, ‘속죄’, ‘구원’과 같은 것으로 포장하는 것을 경멸했는데,
당시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통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인데,
어떠한 의미로 고통이 포장되는 순간 성장의 기회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했다.
이와 더불어, 니체는 그의 철학적 스승인 쇼펜하우어의 주장에도 반감을 가졌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원인을 ‘욕망’으로, 욕망의 원인을 ‘의지’로 생각했다.
그는 고통 없는 삶을 위해 인간은 ‘자기 의지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소멸’ 또한 금욕주의 철학으로 보았는데,
“삶을 부정하고 무를 숭배하는 철학”으로 간주하며,
금욕주의 철학의 극단적인 예시로 강하게 비판했다.
위 내용들을 통해 니체가 금욕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금욕주의는 고통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하고, 고통을 포장한다.
금욕주의는 고통을 도덕적 우월성으로 바꾸며,
금욕주의는 오히려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렇듯 니체는 고통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해석과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3. 니체의 초인은 누구인가?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세 가지 변화”
니체가 제시한 초인은 단순히 ‘고통을 감내하는’ 존재가 아니다.
초인은 그 고통을 자신의 일부로 승화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인간으로,
기존의 도덕적 가치와 신념을 따르지 않는다.
라는 해석을 보고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나의 딱딱한 뇌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니체의 초인과 금욕주의를 함께 살펴보면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금욕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함’이었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함으로 삶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지고,
고통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금욕주의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극복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초인은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인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금욕주의처럼 고통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여(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인은 고통을 단순히 ‘견디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고통 속에서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냄으로써
자기 삶 전체를 새롭게 창조해내는 인간이다.
“초인은 바다와 같다. 그는 모든 것을 삼키고, 정화된 새로운 의미로 되돌린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초인에 대하여”
맨 처음 질문이 초인과 성인은 어떻게 다른가였다. 여기서 그 대답을 아주 조금 엿볼 수 있다.
니체가 비판한 금욕주의의 대상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도덕적 우월성으로 포장하는 종교인들이었다.
반면 우리가 생각하는 성인은 금욕을 통해 어떠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부처(고타마 시타르타)는 금욕 수행을 통해 ‘중도’를 설파한다.
부처 역시 극단적인 금욕 수행자였다. 하지만 그는 금욕에선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극단적인 금욕도, 극단적인 쾌락도 진리를 깨우치는 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중도’의 길을 깨우쳤다.
“쾌락은 마음을 흐리게 하고, 고행은 몸을 망친다.
그 둘 사이에서 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
— 『상윳타 니까야』
( “이 두 가지 극단은 수행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는 감각적 욕망을 좇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 고행이다.
여래는 이 두 극단을 피하고 중도의 길을 깨달았다.” 가 원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한다.
이는 신과의 합일, 자기 정화, 자신에게 주어진 시험으로
금욕은 깨달음과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었다.
이렇듯 실제 성인들의 금욕은 니체 시대의 성직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부처는 금욕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예수는 금욕을 통해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렇듯 성인들에게 금욕은 목적에 도달하는 재료일 뿐,
금욕을 신성시하거나 삶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
성인의 금욕은 삶을 부정하지 않고,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고,
니체가 비판한 금욕주의는
고통을 포장하여 도덕적 권력으로 삼으려는 위선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초인과 금욕주의, 그리고 성인의 예시를 통해 초인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근데 이러한 초인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초인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단지 ‘초인’을 이상으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4. 그럼 내 고통은? 일상의 고통도 의미가 있을까?
뭐 일단은 초인이 뭐고, 금욕주의가 뭔지 알겠다. 근데 그게 뭐?
돈 벌기 바쁘고, 맛있는 간식과 뱃살 사이에 고민하는 것도 벅찬데
그런 거 고민할 시간이 있어?
나는 철학적 주제를 생각하며 그것을 자신과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싫었다.
그러니까, 나도 철학적인 인간이 되고 싶고, 성인과 같이 인생에서 큰 대들보를 세우고 싶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니체의 초인과 나를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면접을 알바하며 없는 시간 쪼개면서 준비했어.
잠도 안 자고 면접 보려고 기차를 몇 번이나 탄 날도 있었어.
고등학생 때랑 대학교 때도 고통을 참으며 공부를 했지.
그렇게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나도 고통을 참는 성인이 되고, 초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이미 초인일지도?”
삶에서 지나온, 가볍게 여길 수도 있는 여러 가지 고통들이
니체의 초인에 대한 개념을 접하니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초인’이 정말 니체가 말한 그 초인일까?
다시 한 번 초인의 개념을 짚어 보자.
초인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나는 어떠한가?
하기 싫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공부를 하며 짧은 세월을 보냈다.
누군가 보면 콧웃음 칠 고통을, 나름대로 큰 고통으로 여기며 견뎠다.
나의 고통은 무슨 의미인가?
안타깝게도, 생각을 거듭할수록 내 모습은 니체가 비판한 성직자와 같았다.
더 나은 삶과 내 욕망을 위해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다.
그 고통은 과연 내게 찾아온 것인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것인가?
나도 어쩌면 결과를 위해 고통을 견디고 있던 것이 아닌가?
나에게 고통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 고통은 목적 의식의 재료로 쓰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통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초인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나는 20대 남짓의 세월을 돌아보며 이렇게 위로한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앞으로 그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5. ‘더 나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필요한가?
아쉽게도 나는 초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대적 금욕주의에 찌들어버린 인간이었다.
니체는 초인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니체와 우리 현대인의 괴리가 발생한다.
나에게 ‘더 나은 인간’은 어떤 의미일까?
사회적 지위의 성공, 남들의 인정, 개인의 성취 등등 나에겐 이러한 업적들이 더 나은 인간을 이룬다.
그렇다면 니체의 ‘더 나은 인간’은?
초인의 의미에서 볼 수 있듯, 고통을 승화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아아, 머리가 더 아프다.
왜 이런 인간상이 필요하고, 우리가 왜 ‘초인’을 이해해야 하나?
일단 그것을 알기 위해선 니체가 살았던 시대상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신은 죽었다. 인간은 초인이 탄생하기 위한 산실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서문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완성된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스스로를 극복하는 존재이다.
19세기 유럽은 산업 혁명 이후, 이성과 과학이 종교를 밀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도덕의 붕괴를 겪는다.
신의 의지로 이루어진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지자, 사람들은 다른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사실 그 의미를 찾는 것은 덧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빠지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니체는 그러한 세상의 흐름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다.
그리고 신이 없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동경해야 할지 생각한 결론이 바로 ‘초인’이다.
“뭐 알겠어. 신이 없어지고, 도덕적 기준이 명확해지지 않으니,
세상의 질서가 혼란해지고, 무력감에 빠지고 등등…
다 알겠는데 말이야,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는 초인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갑자기 없어진 신의 의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의지로 채워졌다.
우리는 어렴풋이 도덕적인 인성과 선함이 세상에 왜 필요한지 안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우리들은 모두 저마다의 의지를 갖고 있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이 없어졌다고 울부짖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의미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니체가 생각한 초인의 의미는 단순히 삶의 지표가 아니었다.
다시 니체의 시대로 돌아가서, 산업 혁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잃었다.
단순히 돈을 벌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삶의 자세에 대해 많은 고민이 생겼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어떻게 꾸며 가야 할지 고민해 본 적이 있었을까?
나는 니체의 ‘초인’이라는 개념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초인의 필요성, 즉 ‘더 나은 인간’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인간’이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무력감이 팽배하던 당시의 시대상으로 인해
니체는 인간이 삶의 의지를 잃은 지금, 인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에게 초인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인류를 지탱할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즉 초인의 ‘더 나은 인간’은 더 나은 인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신이 죽은 지금, 인류의 존속을 위해 그들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더 나은 인간’, ‘초인’은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초인’은 ‘고통’을 양분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고귀한 것인데,
그 당시의 금욕주의는 초인의 등장을 방해하는 유해한 것이었다.
이렇듯 니체의 인류에 대한 고민은
신의 죽음, 초인의 필요성, 금욕주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신은 죽었다. 우리는 그를 죽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 바다를 건널 것인가?”
— 『즐거운 학문』
“인류는 위대한 인간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우리를 다시 삶에 묶어두는 존재다.”
— 『선악의 저편』
6. 나는 무엇을 향해 걷고 있는가?
‘초인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신이 없어진 지금, 인간의 존속을 위해 ‘초인’이 필요하다.”
니체의 도덕에 대한 고민은, 결국 우리에게 ‘초인’으로서 삶을 바라볼 필요성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어떤 인간인가?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나의 고통은 나에게 어떤 시련을 주었는가?
그저 그 고통을 참아내면, 미래에 달콤한 과실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냥 참아내고, 적당히 넘기면 그 고통은 성적으로, 돈으로, 성공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그저 현대적 금욕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초인이 아니다.
나에게 고통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고통을 재료로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고흐는 정신적 고통과 빈곤, 외로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니체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 또한 고독에 허덕이며, 살아생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풀어냈다.
부처는 부유한 유년기를 버리고, 극도의 금욕을 실천했다.
금욕과 쾌락 사이에서 중도를 찾아낸 그는 자신만의 해탈을 이룰 수 있었다.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27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정책이 없어진 후, 감옥에서 나온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백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어냈다.
고흐는 고통을 그림으로 남겼고,
니체는 고통을 철학으로 풀어냈으며,
부처는 고통을 초월해 중도를 설파하고,
만델라는 고통을 화해의 메시지로 바꾸었다.
이렇듯 초인의 발자취는 후세에도 퍼져
현대인에게 깊은 감명을 남겨준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초인은 선하거나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의지를 잃지 않았으며, 그 고통을 그들만의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해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통의 피해자가 아닌, 고통의 창조자가 된다.
이들은 모두 자기 고통을 자기 언어로 말한 사람들이다.
그 언어는 도덕이 아니라 창조이고,
복종이 아니라 해석이었다.
초인은 고통에 끌려다니지 않고,
고통의 방향을 자기 손으로 그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내 고통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아마 그 물음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다만, 끊임없이 그 질문을 고민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초인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지금 내가 견디는 고통이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그 고통을 어떻게 쓸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초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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