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기장

우주에서 가장 이상한 것 ‘생물’

고양이뛴다 2023. 8. 2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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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과학에 관심에 많다.
대학생인 지금 자연대 학과를 다니기도 하고 평소 멍 때리며 이상한 상상을 할 때면 가끔 어디서 주워들은 과학 이야기들을 되짚어 본다. 머리속에서 만든 나만의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보기도 한다. 물론 자연과학의 중심인 물리를 깊게 다루는 학과도 아니고, 수학 지식들은 수능 이후로 삭제해버려서 일반 사람 정도의 과학 수준이다.
방학인 지금, 시간이 너무 남아돌아 하루 반나절씩 하던 게임들도 지겨워져서 놀랍게도 요즘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교실에 갈 일이 없으니 OTT 기기로 전락한 아이패드에 구글북 어플을 깔고 여러 책들을 구입해서 읽어 봤는데, 처음 읽을 때는 내 집중력의 한계에 자괴감이 올 정도로 책을 오래 붙들고 있지 못했다.
솔직히 책을 오래 못 읽은 데는 그 책의 종류도 한 몫 했다. 나는 남이 보든 보지않든, 혼자서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야 적성이 풀린다. 처음 읽을 책을 고를 때도 이런 심리가 똑같이 작용했는데, 누구도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 관심도 없었고 내가 남에게 떠벌릴 생각도 추호도 없었지만, 나는 있어보이는 책(소위 말해 조금 어렵지만 많은 지성인들이 추천하는 책)을 읽고 싶었다. 물론 상상 속에서는 누군가가 교양있는 책을 읽는 나의 모습을 우연히 발견해 주길 바란다. 처음에는 가볍게 코스모스였다. 놀랍게도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코스모스를 읽다가 기숙사에 그 책을 들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곤 홧김에 구글북에서 샀었다. 책을 읽은 진행도도 표시 돼 있었는데, 거의 3분의 1을 읽었더랬다. 이럴거면 왜 샀는지 ㅋㅋㅋ
아무튼 나는 고딩 시절에 읽다만 코스모스를 시작으로 총균쇠, 이기적인 유전자까지 아주 힘들게 읽었다. 글을 쓰며 생각하니 허영심에 가득찬 내 모습이 상상이 간다. 문득 이동진 평론가가 어느 유튜브 영상에서 허영심에 대한 이야기를 한것이 기억이 난다. 허영심이야 말로 교양있는 문화를 만들고 소모하는 원동력으로 생각한다고 했었다.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어렵지만 있어 보이는 것들을 허영심으로 억지로 경험하고 교양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는 논리였고, 나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런 이상한 허영심에 빠진 나는 무슨 자신감인지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그 전에 ‘위험한 철학책’이라는 책도 읽었는데 비교적 짧고 가벼운 책이라 추천드린다.
‘국가론’을 짧게 소개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와 대화를 나눈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소크라테스의 침 냄새 나는 열띤 토론을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책의 초반 화두이자 전체 목적은 ‘올바른 사람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근데 왜 책 이름이 국가론? 이는 일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책의 영어 제목는 ‘The republic'이다. 물론 국가, 정치 체계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실제로 대부분이 이런 내용이지만, 결국은 한 사람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토론의 목적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책 제목의 의미는 ‘국가’보다는 한 사람의 ‘올바른 인생관’(을 위한 일종의 규율)? 같은거라 느껴졌다(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개인으로부터 국가까지 생각을 확장 시키면서,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올바른 사람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여느 철학책이 그렇듯 생각의 가지들이 오만 방향으로 뻗어가는데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것은 본질 혹은 실재(이데아)에 대한 고찰이었다.
실재란 무엇인가? 그 당시 소크라테스와 기성 철학자들 사이에는 이 ‘실재’에 대해 수 많은 의견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며 실재가 아니고, 그 너머에 이 허상들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 실재라고 믿었다. 실재는 그 당시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지식 그 자체이다. 유명한 동굴 비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동굴에 갇혀 몸이 묶이고 고개도 돌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동굴의 벽과 그들의 그림자가 온 세상의 전부이고 진리로 보인다. 근데 만약 이 그림자(눈에 보이는 허상)가 모닥불의 크기나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면, 그들은 이 세상이 흔들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동굴 속의 그림자이고 이 그림자를 비추는 본질, 실재를 우리가 보지 못한다면?
글의 초반에 나는 과학에 관심이 많고 물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물론 대학에서 배우는 물리는 안 좋아한다. 양자역학을 수학으로 배운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소크라테스의 실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종교적인 느낌이 드는 동시에 무언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종교를 믿지는 않는 내 신념에 금이가는 것을 느꼈다.
우주는 넓다. 관측가능한 우주까지만 해도 지름이 900광년이고 그 안에 있는 은하는 2조 개, 그 중 하나인 우리 은하만 해도 5천억개의 항성이 있다. 족히 생각해도 상상의 수준을 뛰어 넘는 수 많은 행성들이 있지만 그 중 생명이 살아있다는 흔적이 있는 행성은 아직 우리 지구 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저마다 행성을 거느린 항성들은 빛나며 에너지를 뿜고, 행성들은 그 주위를 돌며 몇 천억년이고 공전한다. 그 중 상대적으로 작은 항성인 태양과 그보다 더 작은 지구에서 우연히 생명이 탄생하고 인류가 생겨났다. 우리들은 수많은 발자취를 남기며 지구에 살아왔다. 문화를 일구어 건물을 짓고, 사고하며 토론하고, 때론 이웃을 침략하고, 인터넷을 만들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함께 공상하며 살아간다. 사회를 만들어 때론 기뻐하고 슬퍼하며, 언젠간 이 땅에서 스러질 육신을 겨우 가누며 인생을 살아간다. 먹고 마시고, 일을 나가고, 무심하게 이어폰을 꽂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거리를 거닐다 버스를 탄다. 가죽떼기에 공기를 넣어 발로 차는 것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반대편에서는 그들의 눈을 가리는 지도자에 열광한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한낱 동물이다. 우주에선 안압으로 눈알이 터지기에 돌아다니지도 못하면서 이 좁디 좁은 지표면에는 인간이 없는 곳이 없다. 모든 인간이 사라져도 지구는 상관없다. 오히려 다른 동물들을 생각하면 그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영감을 받는 것도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내가 죽고나면 상관 없다. 그러면서도 이게 뇌 속의 전기 작용이고 호르몬 작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욱 쓸모 없게 느껴진다.
우리 인간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주로 나가는 것? 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 어쩌면 그 무엇도 인생의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태초의 동물에서 부터 내려진 ‘우수한 유전자 걸러내기 프로젝트’를 위한 삶의 갈망일 뿐일 수도 있다.
....... 이런 생각들을 자주하니 깊은 생각에 빠지면 자주 비관적으로 변한다. 그래서인지 실재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동굴의 그림자처럼, 우리가 보는 것이 허상일 수도 있다. 마치 3차원을 넘어서는 4차원 공간처럼.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는 ‘우리’도 보인다. 말 그대로 정말로 우리도 보인다. 아빠, 엄마도 보이고 친구도 보이고 거울 속의 나도 보인다. 만약, 정말 만약에 우리 육체의 허상을 벗어나는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지금 사고하고 있는 ‘나’인가? 내가 실재에 비춰진 허상의 그림자라면 그 실재와 허상인 내 몸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실재가 하나인가? 아니면 여럿인가? 그렇다면 나의 실재도 하나인가? 여럿인가?
이쯤 되면 몸서리치며 생각을 그만 둔다. 방에 들어오고 팬티 바람으로 배나 벅벅 긁으며 게임이나 딸깍거린다. 신기하게도 이런 공상을 그만 두면 비관적인 생각도 말끔히 수그러든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걱정이 되는게 있기 때문이다. 학점에 수강 신청에, 원서도 내고 자소서도 쓰고 아직 토익도 안봐서 조만간 증명사진도 찍으러 가야하고... 방학 동안 번 돈은 게임 사는데, 버거킹 먹는데 다 탕진해서 남은건 텅텅 빈 통장과 머리, 그리고 3자리를 앞두고 있는 두꺼비같은 몸뚱이...
한편으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러한 삶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비관적으로 되어도 스스로 삶을 마감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위대한 무언가가 되고 싶지도 않다. 여러 공상이 오가는 와중에도 슬픈 일인지기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삶의 순응에 큰 불만은 없다. 그렇다고 긴 수명이나 영생에 대해서는 더 욕심이 없다. 그거야 말로 정말 이상한 일이다. 진화에 역행하여 도태로 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냥이다. 사회 시스템에서 발버둥치다가 요상하고 복잡한 문제에 직면해도 나는 그저 살아갈 뿐이다. 약간 ‘그려러니’하는 마인드가 필요한 것 같다.
“인생 네 놈이 뭔데 나한테 이런 시련을 줘? 그래 그냥 꾸역꾸역 살다가 뒈지면 그만이야~”
이런 마인드가 요즘엔 잡혀있다. 딱히 열심히 하고 싶다거나, 반대로 욜로의 마인드도 아니고, 그냥 살아가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언젠간 죽을 것이고 우리가 했던 생각과 느꼈던 감정들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훗날 내 자손에게 이야기를 해주거나, 우연히 누군가가 비슷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말은 정말로 내가 느꼈던 정확히 동일한 것을 남들은 절대 느낄 수 없을 거란 말이다. 이 느낌은 온전히 본인의 것이고 그 누구도 베끼지 못한다. 그 무엇도 재현 불가능한 뇌의 전기작용에 감사하며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감사하며 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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